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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법(문학)/소설 작법

탈구조주의 비평 서설(레이먼 셜든) 요약

by 칼랭2 2023.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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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구조주의’(post-structuralism)의 탄생

20세기의 설화문학이 사실주의의 목표와 태도와 기법으로부터 이탈해 나가면서, 이런 변화에 맞추어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구조주의는 탈구조주의를 탄생시켰다. ‘탈구조주의적 반운동’(counter-movement)은 소쉬르의 언어이론으로부터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소쉬르는 ‘지시어’와 ‘지시대상’이 언제나 필연적인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며, “언어에는 명확한 용어가 없이 다만 차이만 있다.”고 주장했는데, 구조주의의 기본적 분석 체계인 랑그와 빠롤 間에 본질적으로 불안한 성격이 있다는 한계를 발견하게 되면서 탈구조주의적 접근이 시도되기 시작한다.

 

1.롤랑 바르트 : 다원적 텍스트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The Death of the Author,1968)』은 그의 탈구조주의적 관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저자1)의 죽음은 개인의 발화(빠롤paroles)를 비개인적인 체계의 산물(랑그language)로 생각하는 구조주의 속에 이미 내재해 있다고 보았다. ‘말하는 것은 언어이지 저자가 아니다’2) 텍스트는 구조 속에서 재생산될 뿐이라는 말이다. ‘텍스트의 통일성은 그 기원이 아닌 목적지에 있다……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3)

 

『텍스트의 즐거움(The pleasures of the Text,1975)』에서 그는 “위대한 내러티브의 쾌감을 창조하는 것은, 바로 읽는 것과 읽지 않은 것의 리듬이다”라고 말한다. 텍스트를 통해 느끼는 쾌감이라는 것은 단순하고 명백한 표면적 의미를 ‘초월’함으로써 느끼는 감동이다. 일테면 ‘행간’의 의미를 발견해내는 즐거움 같은 것이다.

사실주의적 소설 아방가르드계열
‘닫혀진’ 텍스트 제시 ‘열린(다원적)’ 텍스트 제시
고정된 의미의 소비자 독자의 생산자(producer)化
읽을 수 있는(readely) 텍스트 쓸 수 있는(writerly) 텍스트
소비 생산

『(S/Z,1970)』에서 그는, 모든 텍스트는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 구조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헛된 것이라며 구조주의 내러티브 연구가들을 비판한다.

이 책은 발자크의 중편 『사라진(Sarrasine)』에 대한 것으로서. 바르트는 그것을 561개의 독서단위로 나누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텍스트를 읽도록 하고 있다. 그가 ‘희열을 주는’ 아방가르드 텍스트 대신 사실주의적인 소설을 논하는 것은, 탈구조주의의 원리가 소위 사실주의적 텍스트라 불리는 작품들 속에도 이미 내재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2.줄리아 크리스테바 : 언어와 혁명

『시적 언어의 혁명(1974)』;본질적인 사회적 변화의 가능성은 서열적인 언술의 분열과 연관되어 있다. 시어는 사회의 ‘닫혀진’ 상징적 질서를 ‘가로질러서’ 기호의 반역적 열림을 소개한다. 그것은 “사회질서의 내부에 대항하여 무의식이론이 추구하고 시어가 실현하는 것”이 된다.

 

3.자크 라캉 : 언어와 무의식

진술과정에서 ‘나’라는 주관은 ‘진술 속의 나’인 ‘공표의 주체’와 ‘진술을 하는 나’인 ‘공표하는 주체’로 분리되어 버린다. 이러한 불일치의 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탈구조주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의 이와 같은 관점은 관련체계 안에서 주관적 위치를 발견하도록 해준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성(性)’을 언어적 관점에서 분석하였는데, ‘성(性)’은 유아기에 ‘쾌락의 원칙’에 의해 ‘놀이’의 도구에 불과하지만 곧 ‘현실의 원칙’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어 ‘아버지’라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해준다. 이 과정에서 쾌락은 억압당하게 되고 억압된 욕망은 무의식 속에 남아, 본질적으로 분열된(split) 주관을 형성하게 된다.

찢어진 존재로서의 ‘나’는 불안정한 ‘지시어’와 동일시된다. ‘나’는 하나의 상징적 질서(아버지로 상징되는) 속에서 ‘아들’이나 ‘딸’이라는 역할 혹은 위치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때 ‘지시어’와 ‘지시대상’ 사이의 어떤 연결이 가능하게 된다. 결국 이들의 관계는 역할의 문제이며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당면한 상황에 따라 다른 역할을 부여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불안정하다. 라캉은 프로이드의 꿈이론을 텍스트이론으로서 재해석하기도 했는데, 꿈의 이미지가 겪게 되는 ‘압축’과 ‘자리바꿈’은 텍스트이론에서의 ‘은유’와 ‘환유’라고 할 수 있다.

 

4.자크 데리다 : 해체이론

센터에 대한 욕망을 그는 ‘말중심주의’(logocentrism)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글보다는 말에 특권을 부여(음성중심주의)하는 것을 말한다. 음성중심주의는 글쓰기를 말의 오염된 형태로 취급한다. 기호로 하여금 완전한 현존이 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글보다 말이 사고의 근원에 가깝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를 ‘폭력적인 서열제도’로 규정한다. 말과 글은 모두 ‘쓸 수 있는’(writerly) 속성을 갖고 있으며 둘 다 현존의 결핍된 의미화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서열의 전도(reversibility)가 가능해진다. 이것이 데리다 식의 ‘해체이론’의 첫 단계이다. 데리다가 말/글 같은 대립개념 사이의 불안한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보충’(supplement)이란 용어나 밀턴의「실락원」의 예에서와 같이, 어떤 것이 일방적으로 ‘본원적’이거나 ‘순수한 현존’이기만 한 것이라기 보단 상호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해체주의의 독서는 ‘폭력’이 없이는 그 한 쌍의 대립개념이 아무 방향으로도 계층화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4)

해체주의운동의 의미는 전통적인 지적산물들에 대한 본질적인 재평가를 가능하게 했다는 데 있다.

 

5.미국의 해체주의

드 만의 『눈멂과 통찰』은, 비평가란 어떤 눈멂을 통해서만 비로소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다는 패러독스를 다루고 있다. 이때 텍스트에 대한 해석은 비평가가 채택한 ‘어떤 눈멂’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그 눈멂에 의해서 의미구조는 다원화되는 것이다. 그는 또한『독서의 알레고리』에서 ‘수사적 표현’이 작가로 하여금 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의미하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텍스트가 본질적으로 ‘오독’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독서는 언제나 ‘오독’이 된다. 올바른 오독은 모든 언어가 산출하는 필연적인 오독을 억제하지 않고 포용하려고 노력한다. 이들의 탈구조주의의 수사학적 타입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도, 역사가들의 내러티브가 결국 텍스트성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6.언술과 권력 : 미셀 푸코와 에드워드 사이드

이들 논의의 핵심은 ‘언술’(discourse)이 ‘권력’(power)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가들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니체는 ‘궁극적으로 인간은 사물에서 자신이 이미 부여해 놓은 것 외에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이는, 명명의 행위에 의해서 대상의 의미가 축소되어 버린다는 의미이다.

 

푸코에 의하면, 특정 체제의 언술 속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법칙들과 규제들의 ‘보관소’(archive)에 복종하지 않고서는 생각하거나 말할 수 없다. 당대의 지배적 체제에 복종하지 않으면 배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보관소’는 앞서 언급되었던 롤랑 바르트의 말 ‘말하는 것은 언어이지 저자가 아니다’라는 말과도 상통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언술은 진짜 세계의 권력투쟁 속에서 산출된다. 정치나 예술이나 과학에 있어서 권력은 언술을 통해서 얻어진다. 즉, 언술은 “우리가 사물에게 행하는 폭력”인 것이다. 특정의 언술을 대신해서 행해지는 객관성의 주장은 언제나 가짜이다. 절대로 ‘진정한’ 언술이란 없다. 다만 강력한 언술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언술은 항상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원인이 되기도 하면서 결과도 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권력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반대도 유발시킨다.

 

사이드는 이러한 주장과 아울러, 바르트식의 텍스트읽기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해석의 ‘무제한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텍스트와 현실 사이의 상호연관을 단절하는 행위라고 믿는다. 텍스트가 현실 세계로부터 떠나 비평가의 마음속에 들어 있다고 보는 견해는 텍스트가 발표되는 순간 필연적으로 ‘세속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현실을 등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탈구조주의자들은 텍스트가 실제 말하고 있는 것과 스스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파악하고 있다. 그들은 텍스트가 무엇을 ‘의미’하도록 강요받는 것을 거부한다. 일정한 혹은 지배적인 의미망에 구속되어 있기를 거부한다.

 

언어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그들의 일관성 있는 태도는, 결국 그들이 언어가 없이는 ‘언술행위’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본질적인 한계로 인해 어떤 이에게는 ‘실패’를 암시한다는 전망을 낳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상이 없이 대상을 해체할 수 없듯이 구조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은 탈구조주의자들 자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구조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1) 그가 의미하는 저자란 모든 형이상학적 신분이 제거된 채, 인용과 반복과 메아리와 지시소들의 무한한 저장소인 언어가 교차하고 재교차하는 위치(십자로)로 축소된다.

2) 「저자의 죽음」中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 김희영 역, 동문선, 1997)

3) 상동

4) 「서명사건문맥」글의 세 가지 특성 1.씌어진 기호는, 특정의 문맥에서 그것을 말한 주체의 부재상태에서 뿐만 아니라 특정의 청취자의 부재 속에서도 반복될 수 있는 것이다. 2.씌어진 기호는 스스로의 ‘진짜 문맥’을 깨뜨릴 수 있고 저자의 의도에 상관없이 각기 다른 문맥으로 읽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일련의 기호라도 또 다른 문맥(인용에서처럼)에서 언술 속으로 인식될 수 있다. 3.씌어진 기호는 두 가지 의미에서 ‘간격’(espacement)을 갖게 된다.

 
 

■ 참고도서

『문학비평의 이론과 실제』이상우 外, 집문당, 2002.

『텍스트의 즐거움』롤랑 바르트, 김희영 역, 동문선, 1997.

『자크 라캉』아니카 르메르, 이미선 역, 문예출판사, 1994.

『해체』자크 데리다, 김보현 편역, 문예출판사, 1996.

「자크 라캉: 무의식의 이중구조와 주체화」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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