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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글/음악 이야기

[음악인] 음악왕 윤종신의 윤종신的 삶과 음악

by 칼랭2 2022.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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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사람을 몇 개의 단어로만, 예를 들어 10개 정도의 단어로만 추려서 설명해야 한다는 과제가 주어진다고 가정했을 때, 그 10개의 단어 중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윤종신'일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애청'이라는 걸 시작한 '라디오'의 DJ였고, 태어나서 처음 산 음악 tape의 가수도 '윤종신'이었다.

청소년 잡지에 실린 그의 '외모'는 왠지 모르게 친구들에게 내세워 자랑할 수 없게 하는 위축감을 주기도 했지만,

'윤종신'이라는 세 글자를 모르는 주변의 친구들에게 언제나 내가 언급하던 '좋아하는 가수'는 윤종신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잘 모를 때나, 이제 그의 진가를 알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모이려고 하는 지금이나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가수, 내가 믿은 삶의 멘토는 여전히 윤종신이다.

윤종신 인스타그램

생각해보면, 나는 그의 '음악'보다는 그의 '말'을 더 좋아했고, 그의 '글'을 더 좋아했다. 그의 '가사'를 좋아했고, 그의 '방송'을 더 좋아했다.

MBC 라디오 [우리는 하이틴] 마지막 방송
윤종신 1집

그래서 윤종신 1집을, 어떤 앨범보다 사랑했다. 그 붉디붉은 표지는 여전히 적응이 안 되지만, 윤종신의 자작곡이 충분히 담긴 이 앨범에는 '태초의 윤종신'이 적혀 있다.

윤종신 1집 '처음 만날 때처럼'

이른 나이에 맞이한 친구의 죽음, 그리고 풋풋한 사랑의 속삭임, 아끼는 동료 가수와의 콜라보 등 말하자면 이 앨범은 윤종신의 원형과도 같다. 가사들은 담백했고, 멜로디는 심플하고 대중적이었다. 사실상 모든 곡이 다 마음에 드는 앨범이었다.

그래서였을 거다. 2집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윤종신 2집 - Sorrow

2집은 '윤종신'이라는 이름을 대중에 알린 앨범이었다. 박주연이 작사하고 정석원이 작곡한 '너의 결혼식'이 대히트(?)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 노래의 히트 덕에 가요톱10에도 종종 나왔다.

 

요즘처럼 미리 '어떤 가수가 나온다'는 공지 같은 걸 해주지 않기 때문에, 나는 언제 나올지 모를 윤종신을 보기 위해 방송이 있는 날 저녁이면 미친듯이 뛰어서 집으로 왔다. 학교와 집이 멀었기 때문에, 초저녁 무렵에 하던 그 방송을 처음부터 보려면 버스에 내리자마자 뛰어야 했다. 윤종신은 인기 가수는 아니었기 때문에 초반에 나올 확률이 많았고, 그러니까 첫 부분을 못 보면 놓칠 수 있었다. 연예가중계든 가요톱10이든, 윤종신을 보려면 뛰어야 했다. 윤종신은 물론 거의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너의 결혼식이 가요톱10 10위권 안팎에 머무를 때, 그 곡이 소개되는 것만 봐도 심장이 뛰었더랬다.

팬심의 흔적...

2집 앨범부터 윤종신은 015B를 벗어나 새로운 작곡가들을 만난다.

윤종신은 재즈가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정말 2집에 수록된 재즈는, 정말, 진짜, 너무 별로였다. 90년대 대중음악계에는 정말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골고루 관심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재즈'는 새로운 음악으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재즈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음악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분위기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현철'과 '이소라'. 나는 개인적으로 '어떤날'을 좋아했다. 90년대 재즈는 '리스너들의 세계'에서 상당히 대중적이었고(조덕배의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도 보싸노바로 '재즈'의 한 종류다) 그래서였을지 '조용한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꿈의 음악'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엄청난 리듬감을 요하는 재즈는 '또박 윤종신'에게는 무리가 아니었을지.

 

그가 좋아한다는 '빌리 조엘' 같은 컨템퍼러리 뮤직(어른들 대중음악)을 하고 싶다는 자신의 음악적 포부를 담은 음반이었을까 싶기도 했던, 뭐랄까, 좀 잡탕밥 같았던 2집. 그런데 그 2집은 나의 '광적인 관심과 애정' 덕에 테잎이 늘어지도록 재생되었다.

3집 앨범은 그야말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정석원 작곡, 박주연 작사의 '오래전 그날'이 큰 인기를 얻게 된 것.

윤종신 3집 - The Natural

그런데 사실 나는 이 곡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라디오에 너무 많이 나왔고, 윤종신이 너무 인기 있어져서? 그리고 내가 이 음악을 좋아하기엔,... 나는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니던 때였다. 정서적으로 공감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앨범은 아주 좋아했다. 전반적으로 '애상적'인 느낌이 지배적이기 때문. 3집부터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그렇게 낡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 가끔 찾아 듣게 된다.

윤종신 4집 - 공존

4집은 내가 가장 사랑했던 앨범이다. (8집이 나온 뒤로 바뀌었다.)

윤종신과 정석원 등이 라디오에서 종종 하던 말이 있었다. 명반 중에 4집이 많다고. 어쩌면 그래서 윤종신은 4집을 만들 때, 엄청나게 신경을 썼을 것이다. 4집의 주요 테마는 '복고'. 표지부터 '음악'까지 '복고적 정서'가 가득하다. '90년대정서'가 트랜드가 되어 버린 시대에, '90년대'에 이미 '복고'를 전면에 내세운 음반을 냈다는 건 참 인상적.

아주 우울한 음악과 아주 발랄한 음악이 공존하는 이 앨범의 타이틀은 '공존'이다. 윤종신의 공식 팬클럽 이름도 '공존' 그가 '공존'이라는 단어를 사랑하는 만큼, 나 또한 이 단어를 사랑하고, 이 앨범도 사랑한다.

'공존'은 그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노예'라는 무서운 단어를 희화화하여, 여론의 뭇매를 맞은 적도 있지만 '노예'라는 단어에 담긴 본질도 사실은 '같이 간다'는 거였을 터. 그의 인연은 길고, 그의 주변 사람들에겐 '이름'이 있다.


2004년 10월 15일 동아일보 기사(공연 홍보용 포스터,라서 올립니다. 기자가 윤상 안티인 듯. 얼굴 잘림.)

내가 그의 방송을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가 '이름'이었다. 그는 방송에서 '음악'을 소개할 때면, 그 음악을 작곡한 사람, 작사한 사람, 연주한 사람을 모두 소개했다. 나는 처음으로 '드러머', '키보디스트', '기타리스트'의 이름을 알았다. '소리'를 알았고, 음악을 알았다.

 

그는 자신의 음악이 한 사람의 힘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늘 고백했다. 늘 독려했고, 늘 함께 가자 이끌었다. 그가 지닌 그 '사소한 겸손'을 나는 지금도 가끔 본다. 사람들이 그의 말재간에 폭소를 터트리고, 때론 천박하다고 손가락질을 할 때에도 나는 그의 '태도'를 보곤 한다. 그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 속내를, 사람들은 모르기도 하겠지만, 팬들은 알았을 것이고, 그래서 그가 나오는 방송을 챙겨 보는 '조용한 팬들'이 많을 것이다.

5집 앨범에선 '유희열'을 만나, 그 유명한 '환생'을 발표했다.

온갖 예능 프로그램에 짧은 길이로 삽입되어, 사실상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 같은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 '오 놀라워라' 물론 나는 '오래전 그날'처럼, 이 앨범에서의 '환생'도 좋아하지 않았다. 원래, 기본적으로, 좀, 타이틀 곡을 안 좋아하는 편이다. 1집만 타이틀 곡 좋아함.

하지만 이 앨범에 수록된 세련된 발라드 곡들과, 윤종신의 역사가 담긴 온갖 가사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다시 찾아 듣게 하는 매력이 있다.

그리고 그는 군대에 간다.


6집은 베스트 앨범으로 제작되었지만, 신곡도 있었다.

이 앨범의 신곡도, 좋아했다.

그의 아름다운 음색을 감상할 수 있는, 마지막 앨범이다.

 

그리고 그는, 군대에 가게 된다.

(용인.. 나와 같은 지역에 있었지만 볼 일은 있을 턱이 없었지.)

연예사병으로 복무, 군대 가서도 라디오를 했다고 한다. 군가도 지었다고.

군대에서 그는 '하림'을 만난다. 본명 최현우(최하림으로 CCM 활동한 걸로 아는데..현재는 무종교로 뜨는데..... 응? 그래?)


사진을 무단으로 올릴 수 없어서 미스틱 아티스트 소개 페이지 캡춰해서 올리는데... 이것도 문제가 될까나.. 해당 사이트 링크하면 미스틱 사명 말고, 하림 얼굴이 나오면 좋겠네.. 어차피 사진 무단 업로드도 안 되는데.. ㅠㅠ(사진 클릭하면 미스틱으로 갑니다) ​

윤종신이 여느 '유명 가수'들처럼 앨범 100만장씩을 팔아재끼진 못했지만, 수십만장을 팔아 번 돈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첫 기획사가 윤종신에게 돈을 많이 준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첫 기획사-대영기획/대영AV-는 조용필의 매니저도 했던 분이라고 하던데.. )

 

그래선가 윤종신은 자신만의 기획사, 신스타운을 설립한다.

그리고 '하림'을 키운다. 하림의 음악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만,

 

윤종신은 망한다.

아마도 음악 저장 매체(?)의 변화가 한 몫 했을 듯.

 

2000년대 mp3라는 것이 생겨나고(엄밀하게는 1990년대 후반), 사람들은 무거운 CD-P를 갖다 버리고 콤팩트한 mp3 player로 갈아탔다. 갖고 있던 CD의 음원도 mp3로 모조리 바꿨다. 음질의 차이는 없었다. 불법 다운로드가 성행했고, 대표적인 mp3 공유사이트였던 소리바다가 논쟁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CD를 사지 않았다.

요즘도 그러나?

우리 때(꼰...ㄷ)는 tape를 10개씩 사서 나눠줬다. 그게 팬으로서의 의무였다. 물론 나는 취향을 강요하는 걸 싫어하기도 했고, 돈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승훈 팬이었던 내 친구는 늘 신보가 나오면 10장씩 사서 쟁여두었다가, 친구들의 생일이 도래하면 그 테입을 나누어주었다. 그래서 나에게도 신승훈 3집이 있다. 물론 듣지는 않는다.

 

게다가 '발라드'와 '트롯' 중심이던 한국의 대중음악은 서태지의 등장(1992년) 이후 '댄스음악'으로 바뀌었다. 아이돌 가수들의 음악이 주류 음악으로 자리잡았다. 전통적인 발라드 음악을 파는 윤종신의 회사는,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20대때 번 돈을 다 탕진, 생활이 막막해졌을 때, 윤종신은 예능 출연을 결심한다.

SBS는 유튜브 링크가 안 돼서, 이미지만 캡쳐-클릭하시면 영상으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패밀리가 떴다'에 출연하며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예능인'으로 각인된다.

'라디오 스타'를 통해 '명MC'로 거듭나고,

'슈퍼스타K'와 같은 오디션프로가 '대히트'를 치게 하는 데 공헌한다.


 
슈퍼스타k2 윤종신 심사 편집본 4탄

이렇게 바쁘게 지내는 와중에도 그의 음악은 쉬지 않는다.

음악인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지키고,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월간 윤종신' 프로젝트를 시작,

 

월간 윤종신 2022년 4월호 '처방전' 뮤직비디오

 

 

[월간 윤종신]

프로듀서 윤종신을 주축으로 하는 독자적인 매체이자 기획 전문 집단.

 

 

2010년 4월에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특히 여러 유명 가수들과의 콜라보는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대중에 선사하며 색다른 즐거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MBC에서, 예능 MC로 첫 상을 수상한다.

'최우수상'

(그치, 이제는 줄 때도 된 거지. 라고 생각했더랬다.)

그리고 수상소감을 발표,


 
2014년 MBC 연예대상 최우수상 수상 소감 발표

 

(2013년도 자료가 없어서 아쉬운데... )

모태신앙으로 '기독교' 신앙을 갖고있었던 그는, 수상소감에서 '하나님'은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내가 기독교 신자들에게 갖고 있는 불편한 점 중 하나가 '선민의식'이다. 시상식에 나와서 늘, '하나님'을 언급한다. 세상의 모든 공로가 '하나님'에게로 집약된다. 하나님에게 감사할 수는 있다. 하지만 공적 자리에서 '하나님'에게 모든 공로를 수렴시키는 일은, 함께 일을 한 동료들에겐... 어떤 면에선 무례가 아닐까.

연예인을 '공인'으로 부르는 데, 저어함이 있는 나이지만 '공적인 공간'에서 공적인 태도를 취하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상식이라는 공적인 장소에서의 윤종신의 사려깊은 태도는 언제나 작은 깨우침을 갖게 한다.

매달 음원을 발표하는 '성실함'은 이따금씩, 다른 가수들의 리메이크 등을 통해 대중에 조금씩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어쩐지 '예능인'이라는 이미지가 점점 더 굳어가고 있을 즈음...

 
[Listen 010] 윤종신 - 좋니

미스틱 Listen 프로젝트에서 발표한 '좋니'가 공전의 대히트.

역주행의 신화를 만들어내게 된다.

그것이 2019년의 일.

같은 윤씬데 왜 이렇게 다른지 모르겠어요.

윤종신이 한 라디오에서 '윤상'의 음악을 소개하며, 자신을 낮춰 말하며 한 말.

(그런데, 윤상의 본명은 이윤상... 윤씨 아님 ㅋㅋ )


다른 가수들의 훌륭함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20여년의 음악생활을 해 왔던 그에게 '왕관'이 씌워지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그의 음악성이 대중에 각인되었다. 그는 '좋니' 음원으로 30억원의 수익을 회사에 안겨주었다고 한다. 회사에 음원의 권리를 주는 태도도, 신기하다. 회사의 발전, 음악의 발전을 위해 욕심을 놓는 일. 어른의 자세다. (대신 그는, 다른 방식으로 돈을 번다. 방송에 출연하고, 가족 사업으로 보이는 식당을 운영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방송을 접기로 결심한다.

'이방인 프로젝트'의 시작.

무엇보다 자신의 '예술가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고민했던 그의 '과격한 선택'으로 그는 무얼 얻었을까?

팬데믹과 모친의 타계로 인해 이른 귀국을 해야 했던 그였지만,

 

윤종신 - 좋니(JTBC '바라던 바다' 출연분)
 

대중은 오히려 그를 빨리 보게 되어 반가웠을 듯.

'고정 프로그램은 하지 않는다'는 기준을 갖게 되었다는 그는, 시즌 방송에만 출연중.

범죄를 테마로 하는 방송 중 내가 유일하게 신뢰했던 '알쓸범잡' 2시즌과 SBS 방송을 마무리하고

이제 또 새로운 방송 프로그램(전체관람가, 뉴페스타, 청춘스타)을 진행할 예정이라는 그.

조급하지 않게, 성급하지 않게, 욕심내지 않고, 딱 살아갈 만큼

그렇게 살아가면서도 성과를 내는 성실함에 박수를 보낸다.

그렇게 살아야지.

그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참 고맙다.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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