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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배수아,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by 칼랭2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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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배수아 장편소설

 

 

 

모든 개인은 감당해야 할 스스로의 몫을 타고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의 역사는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한 세트의 대량 가공품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p.283

 

안타깝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모두에게 감당해야 할 몫이 있는 것이고, 그러한 몫이 한 인간의 정체성을 만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흔히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것’으로 인식하는 ‘가난’에 대한 비틀어진-이방인으로서의 시각을 이 소설을 통해 보여준다. 가난은 고통인가. 수치인가.

 

가난이란 뭘까. 사람들은 '굶어 죽지 않는 것'만 해결된다면 가난은 거의 해결된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유행을 따라갈 수 없게 하는 어떤 삶의 한계가, 가난의 단점이지도 않다.

 

이 소설에는 비루한 삶을 사는 두 남자가 등장한다. 한 명은 대학교수를 했던 중년의 남자이다. 그런 그가 집을 보러 온 여인에게 '백 원만'을 한다. '백 원만' 그들에겐 오직 '백동전'만이 유용하다는 듯이. 백 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거의 아무 것도 살 수 없다. 그에게 동전은 동전으로써의 쓸모를 상실한 것이다. 또 한 명의 남자는 대학교육을 받은 적이 있지만, 먹는 것만 해결된다면 아무런 바람이 없는 사람이다. 그에겐 자본주의적 욕구가 없다. 그에겐 살아있음만이 가치 있다. 그 어떠한 가치로도 자신을 포장하지 않는다. 그에겐 돈이란 게 필요 없다. 그는 노동하지 않는 대신, 돈을 달라고도 하지 않는다. 실물로써의 '먹을 것'만 충족되면 대만족이다. 담백함만으로 무장된 그는,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비루한 삶이지만 그로써는 충족된 삶이다. 그것은 그의 가치관이다. 그는 그러한 가치관을 통해 개별적인 삶을 영위한다. 어떠한 대중성과 이데올로기로부터도 자유롭다.

 

돈이라는 허상을 좇는 자본주의시대에 이 소설은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가난을 비난하거나 어떤 실용적인 꿈을 강요하는 사회를 비판하는 것 같다. 가난이 사회의 발전으로 인해 파생된......... 어쩌고저쩌고,.........어쩌구 저쩌구, 하며 떠드는 인물도 나오지만, 가난은 산업사회의 산물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인간이 생기고 재화가 생기고 그것을 분배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 인간이 처하게 되면서부터 계속해서 있어왔던 것이다. 그것은 '필수불가결'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은 불완전해서, 재화를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나눠줄 수 없다. 다만, 공평함을 지향할 따름이다. 그랬을 때,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가난해졌다고 해서, 심지어는 가난을 선택했다고 해서, 비난할 수 있을까. 재화의 불평등한 분배로―혹은 현실적으로 불가피하게 생겨나는 ‘틈’때문에― 남아도는 재화의 전부가 아닌 필요한 조금의 양이나마 얻어가고 싶다는 사람에게 재화 혹은 물질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판단하기에 이미 쓸모없는 물질이기 때문에―누구에게도 쓰일 수 없을 정도로 무가치한 물건이기 때문에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줄 수 없다고 말한다거나 노동을 하지 않으니 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또 하나의 폭력이다.

 

노동이란 것도 결국 사회적 산물이고, 사회 속으로 유입시키는 하나의 조건이다.

 

뭐, 노동을 통해 살아 있는 것을 느낀다고 해도, 사실 그 살아있음이란 것도 '타자'의 눈이 나를 본다는 의미. 노동을 통해, 타자가 나를 인식하고, 그러기에 살아 있는 것을 느낀다는 것 아닐까. 결국, 나는 나 스스로 나를 느낄 수 없다. 나에겐 노동이 필요하다. 그것은 사회 속에 편입되기 위한 몸짓이다. 노동을 단순히 생계의 수단으로만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강조된 노동의 특성은 ‘사회성’이다. 고독이란, 타자의 눈이 없는 상태. 그것은 나의 시선만이-물론 그것조차도 이미 오래도록 타자의 눈에 의해 강요되고 정리된 어떤 형식이긴 하지만- 나를 보는 상태이다.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고독으로 향해가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진 않을까.

 

그러니까, 배수아 소설에서의 '노동하지 않기'란 '이방인 되기'와 동격이다. 돈이라는 사회적 산물을 거부한다는 것은, 사회적 인물이 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결국 아무것도 즐기지 않고, 오직 먹을 것만 해결되면, 잠자는 것과 최소한의 욕구만 해결되었을 때 만족하는 인물. 물론 그런 인물은 거의 가상이지만, 그는 지극히 비사회적이고, 일탈적인 인물이다. 배수아는 이 사회 속에서, 가장 비사회적인 인물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사회 속에 살기 때문에 이 사회의 밖으로 도망치고 싶은 것이다.

 

결국, 예술이란 것도 사회적 산물이니까. 인간 이성의 산물이니까. 그것마저도 거부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였다. 어쩌면 예술은 돈보다 더 사회적인 산물일지 모른다.

 

배수아는 사회 밖으로 나가기에 열심이면서 가장 사회적인 '언어'를 쓴다. 재미있는 일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것이 언어의 자정능력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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