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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읽기(책)/소설 읽기

[장편소설] 아멜리 노통브, 반박 - 타인은 지옥

by 칼랭2 2023.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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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이 바로 지옥이다1)

아멜리 노통의 소설 『반박』2)을 중심으로

 

파괴의 생산성

인간만큼 파괴를 사랑하는 종種은 없을 것이다.3)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파괴란 비단 생물학적인 파괴(殺傷)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신적인 영역으로까지 확대된다.

―이라크 문제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사람을 죽이느냐 죽이지 않느냐 하는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더 강력하게 인류를 지배하는 ‘정신의 영역’간의 분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노통이 그려내는 파괴와 죽음의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단순히 생물학적 죽음만을 염두에 둔다면 그녀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파괴와 죽음의 문제는 상투적인 수준에만 머물 뿐이다. 우선『살인자의 건강법』에서 그려지는 늙은 소설가를 살펴본다면, 그가 젊은 시절에 죽인(혹은 죽였다고 추정되는) 여인의 경우, 그는 그녀를 살해함으로써 영원히 그녀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믿음을 갖게 되는데, 그녀의 생물학적 죽음이 오히려 그로 하여금 그녀를 영원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자신이 영원한 존재가 되기를 희구하며, 여기자에게 자신을 살해해달라고 종용한다. 그녀에게 있어 ‘파괴’는 특별한 의미를 생성해내는 하나의 기술이다. 역설적이게도 ‘소멸’이 의미를 ‘생성’해 내는 것이다.

 

존재를 위해 무언가가 파괴되어야 한다면…….

노통의 소설에서는 늘 무언가가 파괴된다. 『로베르 인명사전』에서는 플렉트뤼드의 특별함을 위해 부모가 파괴되고 심지어 작가 자신이 파괴된다. 『사랑의 파괴』는 제목에서부터 그 ‘파괴’의 의도를 여실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고, 『적의 화장법』에서는 분열된 자아가 육체를 파괴한다. 왜 파괴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타자와의 소통이 파괴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든, 그 파괴가 비로소 자신을 형성해내는 기제로 작용되기 때문이다.) 목숨을 건 대화는 결국 ‘나’와 ‘타자’를 변화시킨다. 변화는 본래성을 상실시킨다.

 

『반박』에서 에밀은 베르나르댕을 살해함으로써 그 자신의 신념을 져버리게 된다. 신념의 죽음, 그것은 자아의 죽음이기도 하다.

 

오늘은 눈이 내린다. 1년 전 이곳으로 이사 온 그날처럼. 나는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본다. <눈이 녹으면, 그 흰빛은 어디로 가는가?>라고 셰익스피어는 묻고 있다. 그 이상 위대한 질문이 어디 있으랴.

나의 흰색은 녹아 버렸고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두 달 전 여기 앉아 있었을 때,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었다. 아무런 삶의 흔적도 남기지 않은, 그리스 어와 라틴어를 가르쳐 온 일개 교사라는 것을.

지금 나는 눈을 바라본다. 눈 역시 흔적을 남기지 않고 녹으리라. 하지만 이제 나는 눈이 규정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베르나르댕을 살해한 후, 에밀은 절망한다. 한 사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자신의 신념과 의지, 자신을 형성하던 하나의 윤리를 희생시켰기 때문이었다. 죽음을 빛으로 여기는 것은 베르나르댕의 윤리관이었다. 그러나 에밀은 그 자신의 윤리관을 파괴하면서까지 타자의 욕망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킨 것이었다. 생물학적으로는 베르나르댕의 죽음이었지만 상징적으로는 에밀 그 자신의 죽음이라는 아이러니한 결론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에밀은 ‘눈’처럼 규정할 수 없는 타자라는 존재에 의해, 손상된 자아의 경계로 인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소설의 처음으로 돌아와서…….

이 소설에서, 에밀은 끊임없이 <우리집>이란 단어를 언급한다. 베르나르댕은 <우리집>으로 매일 오후 네 시만 되면 찾아왔고, ‘예’ ‘아니오’라는 간단한 대답 외에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상적인 대화법이라 할 수 없었고, ‘말이 통하지 않는 그’를 에밀은 싫어하게 된다. 에밀은 끊임없이 베르나르댕과의 대화를 시도하지만 쉽지 않다. 그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는 매일 자신의 집으로 찾아오고 자신의 윤리관(그것은 어떤 ‘정체성’이라 명명할 수도 있다.) 때문에 그를 거부할 수 없다. 그의 잦은 방문이 소중했던 제자를 자신으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만들기도 한다. 베르나르댕은 단지 ‘방문’이라는 한 가지 방법을 통해서, 그 외의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에밀의 영역을 갉아먹는다.

<우리집>이라는 ‘나’의 영역은 베르나르댕이라는 ‘타자’에 의해 끊임없이 불려지고, 침범 당한다. 그래서 마침내는 ‘타자’가 나의 영역을 당연하게 ‘자신의 영역’이라고 여기게 된다. 타자가 나의 영역을 자신의 영역으로 여기게 될 때, 나의 영역은 주체성을 갖기 힘들어지게 되고, 마침내 그것은 윤리관의 파괴라는 결정적인 실수로 불거지게 된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정말이지 어떤 이론적 기준이나 특정 의도에 따라서 텍스트를 기술하려는 내 텍스트의 작위성에 신물이 나기 시작한다. (때때로 어떤 분석은 텍스트를 싱겁게 만든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분석이 그런 것 같다. 즐겁게 읽은 소설이었는데, 그 재료를 나열하려고 보니 요리의 덩어리가 아니라 소금, 후추 따위의 싱거운 요소들만 남아버리는 것 같다. 말의 중심이 흩어져버린다. 뭔가가 빠져 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제부터 내 의지대로 소설과 의미화에 대해서, 노통과 타자에 대해 기술하려고 한다.

 

 

 

아멜리 노통과 소설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

“내 작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제기되는 사안은, 끈덕지게 남을 괴롭히는 타인이라는 문제입니다. 결코 만만한 수수께끼라고는 볼 수 없지요.”

 

소설을 쓰는 작업은, 혹은 의미를 생산해 내는 작업(모든 예술 활동이 그러할 것이다.) 동시에 의미를 파괴시키는 작업이 되기도 한다.

처음『로베르 인명사전』을 읽었을 때, 나는 단지 ‘특별함’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만 머물렀을 뿐이었다. 이 작가는 참 특별한 개인을 만들 줄 아는 재주가 있구나. 그렇게 감탄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것만이 아니었다.

인명사전에서 따온 이름인 플렉트뤼드라는 발음하기도 힘든 그 이름에서부터 플렉트뤼드는 특별한 삶을 운명처럼 부여받았지만, 그녀의 특별함을 위해 많은 것들이 희생되었다. 먼저 그녀의 아버지가 살해당했으며 그녀의 어머니가 자살을 했다. 왜 그들의 죽음이 필요했던 것일까.

인명사전, 혹은 어떤 ‘사전’에 실리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과는 구별되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어야만 한다. 하다못해 같은 이름이 실릴지언정, 다른 특성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남들과 구별되게 하는 특별한 의미를 위해, 플렉트뤼드의 삶을 ‘가지치기’를 당하고 오직 ‘춤’만이 남게 된다. 그리고 춤을 위해 ‘건강’마저 가지치기 당하게 된다.

나는 이러한 정황이, ‘대상을 의미화 하는 과정에서 희생되는 부차적 특질’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셰익스피어의『로미오와 줄리엣』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말, ‘이름이란 건 뭘까. 장미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해도 달콤한 향기에는 변함이 없는 것을’이란 말에서처럼, 장미라는 이름이 ‘달콤한 향기’까지 기술해주지는 못한다는 언술의 한계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플렉트뤼드가 아무리 특별한 존재가 된다고 해도 그녀를 위해 희생된 사람들의 명단까지 공개되지는 않을 거란 사실 말이다. 결국 그녀는 인명사전에 실릴 만큼 특별한 여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특별하게 여겼던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 (특별함이란 건 상대적이라는 것일까.)

 

『살인자의 건강법』에서 프레텍스타 타슈는 여기자의 손에 살해당하길 원한다. 죽을 날만 받아 놓은 대문호가 ‘살해당하다’니! 이처럼 특별한 사건이 어디에 있을까. 그가 원했던 것도 특별함이다. 타슈가 기다리는 것은 ‘자연적인 죽음’이지만, 그는 그런 평범한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그건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살해해달라고 애원한다. 여기자는 갈등한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살인자가 된다는 사실보다, 타슈의 작품이 그 본질과 관계없이 다른 사건(살해당했다는 개별성, 상징적인 죽음)으로 인해 특별한 권위를 부여받으리란 전망 때문이다.

타슈가 곧 죽으리라는 연락을 받고 모여든 기자들 대부분은 타슈의 작품을 읽지 않고 오직 명성만을 생각하고 온 작자들이다. 타슈와 유일하게 대적한 말상대인 여기자만이 타슈의 전작을 읽었을 뿐이다.

타슈라는 대상을 의미화한 것은 대상 안에 들어 있는 본질적 요소라기보다는 그 밖의 요소, 일테면 아우라라 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었다. 타슈는 그것을 간파하는 작가였으며, 때문에 여기자에게 자신의 소설이, 아니 타슈라는 자신이 더 특별한 아우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살해해주기를 부탁하는 것이다.

이것은 문학에 대한, 예술에 대한 통렬한 풍자로 읽힌다.

 

왜 그녀는 특별해지고 싶었던 걸까.

타자는 어떤 식으로든 자아라는 정체성을 파괴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그녀는 세 살적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마치 ‘신神’과 같았다고 기술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에서 세 살 꼬마아이는 일본인 보모와 벨기에 부모 사이의 경계에 위치한, 모든 사람들과 대화하고 그들을 이해하는 존재로 군림한다. 그 시절 명확한 언어적 도구가 있었다면 그러한 군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뭐라 딱히 말하기 힘들지만, 모든 것과 소통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고, 그것이 그녀를 신으로 군림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무언가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게 마련이다. 신으로 지낼 수 있는 시간은 짧다. ‘사회’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그녀를 간섭하는 타자의 생성은 언제부터였을까. 굳이 추측해본다면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가 아니었을까.

 

『반박』이란 책의 뒤편에 실린 ‘옮긴이의 말’에서 번역자 김남주는 노통의 소설에서는 늘 <주변인>이 등장한다고 말한다.

아멜리 노통은 외교관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곳에서 벨기에인 노통은 자신을 주변인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자신을 소외된 자나 타자로 인식하지 않기 위해 ‘특별한 개인’으로 포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눈이 녹으면, 그 흰빛은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끊임없이 타자의 영향 아래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은 눈과 같아서 쉽게 눈치 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고 어쩌면 눈이 녹은 뒤, 존재는 더욱 선명하게 빛날지 모를 일이다.

 

사회 속에 버려지지 않았다면, 타자를 인식할 필요도 없을 것이지만, 인간은 누구나 사회 속으로 버려지기 마련이고, 타자와 소통을 하던 불통을 하던 관계하고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타자를 지옥이라고 명명했던 사르트르의 말이 어떤 의도로 씌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러한 명명법은 타당성을 갖는 것 같다. 하나의 사회는 개인들 간의 투쟁의 장 같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서로의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때때로 갈등을 일으키고 때때로 지옥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지옥의 실체를 모르는 것처럼, 타자라는 지옥에 뜨겁고 고통스러운 불길만 솟는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것 같다.

 

특별한 의미만이, 타자의 지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노통은 그것을 소망했던 것이 아닐까.

노통은 살고 싶었다.

그래서 매일 ‘자살충동’과 싸우면서 글을 쓰는 것이다.

죽고 싶다는 것은 살고 싶다는 말의 역설적 표현이기도 하니까.

 

글을 마치며

두서가 없었다. 애초에 나는 노통의 소설들을 통틀어 ‘타자’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려고 했지만 겁을 먹었고, 그래서 『반박』이라는 소설만 다룰까 생각했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그래서 구성도 뭣도 없는 어그러진 글이 되어버렸다.

왜 글을 쓰는 것일까. 새삼 생각해 보면, 자기 자신에게 하는 고백 같기도 하다. 보고서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글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나를 위해서 썼다. 노통의 소설에서 내가 읽고 싶었던 어떤 의미에 대해 썼다. 그래서인가 앞서의 흐름과는 다소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던 것 같다.

굳이 어떤 결론에 대해 말하자면, 그런 것이 아닐까.

타자가 없이는 나를 볼 수 없다. 그는 늘 나를 간섭하고 나를 형성한다. 그리고 나는 타자를 죽이지 않고서는 ‘나’ 자신이 될 수 없다. 경계란 모호하지만 결국 무언가를 보여준다.

뭐 이런 것?!

 

‘숙제’라는 의무의 압박에 시달리다가, 영화를 봤다. 알란 파커의 <버디>라는 영화였다.

사회적인 인간이 되라고 강요하는 세상에서 오직 ‘날고 싶다’는 이상만을 꿈꾸며 사는 ‘버디’에게 ‘사회’는 답답한 ‘새장’일 뿐이다. 그를 이해하는 유일한 동지, ‘알’이 전쟁터로 나가게 되면서 버디는 날개를 잃은 새처럼 고립되고 만다. 알이 전쟁터에서 얼굴에 상처를 입고 돌아왔을 때, 버디는 스스로를 자신의 심연 속에 가두어버린 채 새의 몸짓과 새의 언어로만 살아 있었다. 알은 끊임없이 버디를 사회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지만 알은 ‘다른 사람과는 할 얘기가 없다’며 알과만 대화한다. 알은 버디에게 있어 충분한 너비의 사회였던 것이 아닐까. 결국 버디에게 알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타자를 배운다는 것은, 결국 사회로 나가서 놀아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교육은 폭력을 생산해 내는 장4)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사회적인 개인을 만든다는 것은 개인적인 개인을 파괴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개인의 영역을 줄이고,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개인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다.

뭐가 틀리다거나 맞다고는 말할 수 없다. 가족도 최소한의 사회라고 본다면, 사회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는 애당초 글러먹은 일이기 때문이다.

 

노통의 윤리관으로 보자면 살인도 살해당하는 당사자가 원한다면 죄가 없을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죄악이다. 자살방조죄라는 터무니없는 죄가 있기도 하지만, 개인의 윤리가 사회 전체의 윤리와 소통되지 않을 때, 개인에게는 엄청난 고통만이 남겨진다. 그것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노통이 계속해서 타자의 문제를 다루는 이유도, 거기에 사회와 자신과의 소통의 문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해 볼 따름이다.

 

2004.11.13

 


1) ‘옮긴이의 말’에 인용되어 있는 사르트르의 말이다.

2) 1999년 ‘열린책들’에서『반박』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으나 2001년에 다시『오후네시』란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상업적 목적이 다분히 작용된 제목 선정 같지만 소설적 주제에는 애초의 제목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3) 심지어, <드래곤 해드>라는 영화에서는 먹이사슬의 최우위에 있는 인간은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다소 냉소적인 해석까지 내놓는다.

4) “증오는 선천적인 게 아녜요. 배워지는 거예요. 학교에서는 인종분리가 성경에 쓰여 있다고 했어요. 창세기 9장 27절. 7살 애들이 계속해서 들으면 믿게 돼요. 증오도 믿게 되고 그것으로 살고 그것으로 숨쉬고 그것과 결혼해요.” 영화 <미시시피 버닝>의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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